<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은 칼뱅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간곡하게 권면한 글이다. 카를 5세는 종교적인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슈파이어 의회를 소집했다가 이듬해로 연기한 상태였고, 그 전부터 마르틴 부처와 칼뱅 사이에 칼뱅이 대표로 황제에게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에 합의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이 책자가 1543년 12월에 제네바에서 출간되고 부처도 이에 크게 만족했으며, 멜랑히톤과 루터에게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칼뱅이 황제에게 보낸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따라 황제가 양 진영에 종교 분쟁의 타협점을 찾게 했고, 양 진영 대표가 모여 임시 문안 작성에 성공했다.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은 트렌트공의회가 정회된 상황에서 이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에 대한 개혁교회측의 불안과 불만이 담긴 글이다. 말하자면 임시안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를 작성한 것이다.
두 책은 본질상 같은 주제인 예배의 갱신과 이신칭의 문제를 담고 있다. 비록 이신칭의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출발이요 원인이며 공통분모이지만, 칼뱅은 이 교리가 예배의 갱신까지 이어지기를 원했다. 하나님 예배가 “인간과 천사의 구원보다 더 앞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신칭의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인상을 주는 루터교회 지도자에게 교리의 전체적인 의미를 찾을 것을 지적한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장 칼뱅
장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인문학, 오를레앙과 부르주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기독교 인문주의 세계에서 활동무대를 얻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학으로 신학을 연구하여 발표한 책 <기독교 강요>(1536)가 그를 일약 종교개혁 진영인 제네바 도시의 책사로 발탁시켜주었다(1536-1538). 그는 또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인 교회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가(1538-1541), 다시 제네바의 청빙을 받고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활동하면서 서양의 교회와 신학, 지성과 문명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1541-1564). 비록 그가 원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데 성공한 셈이다(Cité de Calvin).
개혁파 교의학자요, 방대한 주석가며, 강해 설교자로 알려질 만큼 엄청난 대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상담과 조언, 격려와 위로, 우정과 내면의 토로를 아끼지 않았던 엄청난 양의 서신 교환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사상의 발전을 알려주는 신학 소논문들, 적대자들과 맞붙어 싸웠던 팸플릿들과 논쟁서들, 교회와 학교 설립을 위한 신앙고백서와 신앙교육서, 그리고 여러 법제들을 남겼는데, 이것들을 묶어놓은 것이 바로 <소품집> 이다.
박건택
한국외국어대와 대학원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총신대 신대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파리 개신교 신학대학(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DEA), 파리 4대학(D. en histoire)에서 신학과 문학과 역사의 영역에서 칼뱅을 연구한 뒤, 1987년부터 2016년까지 총신 신대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평생 <칼뱅 선집 총서>와 <종교개혁사상 선집>을 편집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프랑스 현대 기독교 사상가인 엘륄과 리쾨르를 소개하기도 했다. 저서로 <개신교 역사와 신학>, <칼뱅의 자유사상-이론과 실제>, <자크 엘륄의 생애와 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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